[책] 무기여 잘 있어라(어니스트 해밍웨이, 민음사)

소설 초반, 완연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한없이 평화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느끼던 위화감이 익숙함으로 바뀔 즈음, 느닷없이 발생한 완전히 불합리한 살해장면에서 전쟁의 단면을 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쉬워지면서 생명의 가치가 적군과 아군의 구분 없이 무가치함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내 생명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하기 때문이었고, 그 귀한 생명은 언젠가 모두 그 누구도 빠짐없이 꺼진다.
169p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을 능력도 없는 우둔한 계급이 있어요. 그자들이 지금 한 나라를 지배하는 거죠. 그런 부류 때문에 지금 이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전쟁으로 돈도 벌지."
239p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이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요."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을 시키는 거군요."
604p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는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670p "명령이다. 나뭇가지를 꺾어 와." 나는 거듭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척도 않고 몸을 돌려 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정지!" 내가 소리쳤다. 그들은 여전히 양쪽에 울타리가 있는 진흙 길을 따라 계속 걸어 내려갔다. "명령이다, 정지해라!" 내가 외쳤다. 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권총집을 열고 권총을 꺼내 말수가 많던 하사관을 겨눈 뒤 발사했다. 총알이 빗나갔고 두 사람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연이어 세 발을 발사해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745p 지금까지 심문받은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총살을 당했다. 심문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죽음을 다루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놀랍도록 초연한 태도를 유지했고 준엄한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1080p 예술을 창작하는 행위를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라고 불렀다. 예술가들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곧 현실 세계에서 얻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슬퍼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1084p 애그니스 본 쿠로스키한테서 실연당한 이야기와 함께 이탈리아 전선에서 겪었던 온갖 고통스러운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헤밍웨이는 자신이 겪은 뼈저린 경험을 소설의 형식으로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무기여 잘 있어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이 소설을 쓴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소설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1089p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을 능력도 없는 우둔한 계급이 있어요. 그런 부류 때문에 지금 이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1108p 초월적 존재자는 인간에게 기본적인 규칙 몇 가지만 가르쳐 주고는 그를 야구장에 집어넣는다. 인간이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초월적 존재자는 공을 던져 잡아 버린다. 이 야구의 비유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삶의 피투성'을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황량한 우주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참다운 영웅이요 실존주의자인 것이다.
1111p "삶이란 한 편의 비극이라고 믿고 있고 오직 한 가지 결말로밖에는 끝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오직 한 가지 결말"이란 다름 아닌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을 말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간은 누구나 무덤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하이데거가 인간 실존을 왜 "죽음을 향한 행진"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하다.
1114p "마지막 문장에서 그가 말한 '생리적 덫'이란 바로 인간이라면 숙명처럼 걸머지고 있는 죽음을 가리킨다. 죽음이라는 생리적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생리적 덫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