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비빌 언덕, 기본소득

나의 첫 기억은 어머니와 같이 있던 마루였다. 마루에서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장난감 공구함을 가지고 놀다가, 밖으로 나와 철조망 너머의 해운대 백사장과 푸른 하늘을 보고 눈이 부시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햇살로 짐작하건대 시간은 정오 안팎이었을 것이고 얼마 후 집에서 간식을 먹었을 것이다.
난 그 뒤 서울에서 초중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미술학원에 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어나 수학 과외 그리고 학원을 다녔었다. 초등학교 때는 영어를 곧잘 하여 부모님께서 기대를 하였었으나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초반에는 수학이 발목을 잡았으나, 과외선생님의 도움이 커서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었다. 대학에 간 뒤에는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기도 했으나, 여전히 용돈을 받았다. 졸업을 하기 전, 한 국제개발협력단체에 인턴으로 들어갔고, 3개월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나이 28살로, 그때부터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작년에 홈리스분들과 함께하는 야학에서 소풍을 갔을 때의 일이다. 얼굴이 익은 한 학생분께 고향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저 별 뜻 없이 친해지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그분은 본인의 고향을 모른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혼자였고, 아직 어렸던 언젠가 서울에 올라와 종로 인근에서 버스 앵벌이를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사오십 년이 지났다. 그분은 주민등록 없이, 한글을 모르는 채로 50여 년을 사셨다. 비빌 언덕 하나 찾기 힘든 삶이었다.
홈리스 분들의 생애를 듣노라면 몇 가지 전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배울 수 없었고, 가난이 싫어 도망치듯 도시로 왔지만 돈, 학력 그리고 인맥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도 않고 일자리의 질도 좋지 않다. 남보다 조금 자고, 열심히 일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질병, 임금체불, 사고, IMF 등의 위기 때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존재는 없었다. 십여 년간 쌓아 올린 평안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들이 다시 회복할 새도 없이, 명의를 도용한 범죄나 착취가 이어진다.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이 거리로 몰리고 사회로부터 '노숙인'으로 분류되면, 사회는 쉽게 그의 모든 권리를 부정하고 주는 대로만 받아야 하는 존재로 대하곤 하다. 헌법 상 보장된 기본권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격언 앞에 쉽게 비웃움을 산다. 심지어 이 사회가 노동 없이 자본소득을 획득한 사람을 바라보는 부러움의 시선을 떠올리면, 그 격언은 평등하게 적용되지도 않는다.
내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기 전까지 28년간 누렸던 보호의 시간이 누락된 사람이 있다. 일하고 싶어도 장애나 질병 노령으로 일자리를 찾기 힘든 사람이 있다. 이들 모두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근래 들어 기본소득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에 기반한 기본소득과 관련된 논의가 홈리스를 포함한 구성원 전체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