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장판'에서 푸코 읽기 (박정수, 오월의봄, 2020)
p. 54 장애학은 ‘장애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그런 물음이 제기되는 인식틀(에피스테메)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구성되는 인식틀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며, 그 권력 효과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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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에서 푸코 읽기 - YES24
이 시대 변혁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한 장애운동과 소수자운동의 눈으로 푸코를 읽는다. 왕성한 강연과 저작 활동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권력이론을 구성한 푸코는 ‘장애인’이나 ‘도착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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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서 발차기를 하는 쑥쑥이가 내일이면 배 밖으로 나온다는 게 서운한 짝은 입원실 침대에 누워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푸코의 장애에 대한 사유를 소개한 책을 읽고 있었다.
"p. 220, 검사(삼중표지자검사; 태아의 다운증후군 위험도를 계산하는 검사) 절차를 받아들인 여성은 일반적으로 유전적 손상이 있는 아이를 가질 위험성 1퍼센트와 양수검사로 인한 유산 위험성 1퍼센트가 수치상으로는 똑같음에도 후자를 덜 위협적으로 여긴다. 장애아 출산과 유산의 확률을 비교할 때 작동하는 합리성은 이미 중립적이지 않다. 산전 장애아 검사 절차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정부가 견지하는 우생학적 합리성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아이를 잃는 유산의 고통보다 장애아를 낳는 고통의 크기가 더 크게 설정된 세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
수술실에서 신생아실로 올라오는 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 간호사는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를 세어주었다. 나는 ‘스무 개가 아니어도 이 아이가 예쁜 것은 달라지지 않는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발달장애로 이어지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임신 9주 차이던 지난 3월, 짝과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 체온이 40도에 육박해 힘들어하는 짝 옆에서, 나는 임산부의 코로나 확진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을 찾아봤다. 코로나는 발달장애 발생률을, 발열은 자폐스펙트럼장애 발생률을 높인다고 했다. 사람이 장애와 무관하게 존귀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 장애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현이가 발달장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니 생각이 많아졌다. 올초 아이가 태어난 친구는 임신 중에 부부가 확진되었다. 태어난 아이는 선천성 순환계 기형이 있었고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이 당췌 기준을 알 수 없는 장애 분류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다양한 몸에 맞춰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시민권의 경계가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p. 290, 스토아 학파의 또 다른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견유주의자를 정찰견에 비유했다. 견유주의자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인간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인류보다 앞서 파견된 정찰병이라는 뜻이다. 탈시설 장애인의 자립생활도 그렇다. 시설 밖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던 중증장애인이 자립생활을 이어나갈 때, 의사결정은 커녕 의사표현조차 못할 것 같은 발달장애인들이 씩씩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때 그것은 인류 전체의 역량, 사회적 역량의 한계치를 매번 갱신하는 사건이 된다." |
p. 68 장애는 노화라는 국면에 들어 완전히 일반화된다. 인간은 모두 늙는다. (중략) 노인들이 치매, 뇌혈관 질환, 퇴행성 질환, 중풍, 요실금, 골다공증, 우울증, 당뇨, 고혈압, 만성 심부전증 같은 질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저 아파서가 아니다. 그로 인해 활동능력이 제한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추방되어 그저 살아 있을 뿐 인간적 존엄은 상실된 수용시설의 생명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운 것이다. p. 78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책보고서(2016)에 따르면, 정신병원에 4개월 이상 입원한 사람의 48.1퍼센트가 의료적 목적 외에 간병, 보호자 요구, 열악한 주거 환경 등을 이유로 입원한 경우다. 이러한 경우를 ‘사회적 입원’이라 하는데 (중략) 왜 거주시설이 아니라 처우 환경이 훨씬 열악한 정신병원에 거주하는 걸까? (중략) 병원은 ‘장애인복지법’에 규정된 제반 권리, 권리옹호 지원, 시설 서비스 최저 기준을 면제받을 수 있으며 ‘정신건강복지법’이 허용한 ‘약물’, ‘격리’, ‘강박’을 활용하여 관리의 편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p. 81 정신병원은 아주 편리한 감옥이다. 재판을 거칠 필요도 없고, 예방적 조치로서 피해 당사자(가족)나 경찰이 ‘기소’하고 정신과 의사가 ‘반사회적 인격장애’ 혹은 ‘알콜의존증’으로 ‘판결’하면 곧바로 ‘구금’할 수 있다. 구금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보호자와 의사가 필요한 만큼 할 수 있다. p. 83 레이건 신자유주의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1970년대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인종주의적 반격인 동시에 1983년부터 본격화된 ‘감산복합체prison industrial complex’를 지원하기 위함이다. 즉 싸구려 크랙 코카인 유통과 상습 복용에 주로 연루된 거리의 흑인들을 대량으로 민영 교도소에 처넣어 그들의 값싼 노동력과 정부 수급으로 감옥의 이윤을 보장해준 것이다. (중략) ‘저들이 나가면 사회가 위험해진다’고 소리칠 때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의 역할을 무엇으로 여기는 걸까? 복지시설 운영자? 아니면 교도소장? p.88 데카르트는 이성과 광기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나는 착각하는 자일 수 있고, 꿈꾸는 자일 수 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진실에 이를 이성의 형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광인이라는 가정 속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중략) 광인의 말은 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데카르특라 이룬 광기와의 인식론적 단절이다. 그런 인식론적 단절이 발생하면서 광인은 사회 안에서 사회와 단절된 ‘구빈원’에 수용되었다. p. 90 광인을 구빈원에 수용한 것은 절대군주의 통치이성이었다. (중략) 구빈원에 치료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윤리를 비롯한 이성의 명령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적극적인 훈육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사회로부터 추방함으로써 교화, 즉 본보기의 효과를 노렸을 뿐이다. (중략) 광기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오로지 이성의 인식 대상으로 전락했다. p.100 음식을 아주 적게 주거나 용변을 보지 못하도록 손을 결박함으로써 생리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치료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돈을 얻기 위해, 심지어는 용변을 보기 위해 규칙에 복종해야 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치료로 여겨졌다. p. 130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들 뒤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을 판정하는 제3자란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쁘띠 부르주아, 즉 지식인들이다. p. 142 사람들은 어머니 김 씨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하지만 무죄판결을 받은 김 씨가 갈 수 있는 곳은 집이 아니라 치료감호소이다. 흔히들 교도소에 갇혀 징역을 사는 것보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일단 치료감호소는 교도소처럼 강제 구금시설이다. (중략) 치료감호소에는 운동도, 작업도, 직업교육도 없다. 신문과 전화는 물론 종교 활동도 금지된다. 폐쇄 병동에 갇혀 약을 복용하고 어슬렁거리는 게 일과의 전부다. (중략) 더 끔찍한건 감호 기간이 언제 끝날 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치료감호소는 치료를 위한 감호시설이므로 치료될 때까지 얼마든 수감해둘 수 있다. p. 144 시민권이 박탈된 심신상실자를 가두는 치료감호소는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들을 구금하는 외국인 보호소와 묘하게 닮아 있다. (중략) ‘불법체류자’라고불리는 미등록 이주자는 어떠한 범법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존재(체류)’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된 이들이다. p. 197 그들은 가정과 유사한 25평형 생활실에서 생활재활교사의 촘촘한 돌봄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인자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평화로운 양떼처럼. 그런데 그걸로 충분할까? 때리고, 굶기고, 더러운 곳에 방치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걸까? 깨끗한 환경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사고 없이 안전하게 지내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는 걸까? p. 210 규율권력은 개별 인간 모두에게 정상 규범을 주입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진다. 그래서 통치 활동의 양이 과도할 정도로 많다. 반면 생명권력은 ‘인구population’로 파악된 ‘통계학적 생명’의 안전을 목표로 삼는다. (중략) 생명권력이 추구하는 정상성은 개별 인간의 정상성이 아니라 통계학적 정상성, 즉 ‘정상분포’곡선이다. 통계학적 정상성은 평균에서 벗어난 개별 생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생학의 메커니즘이 그러하듯, 무리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필요에 따라 열등한 개체는 도태시켜도 된다는 것이 근대 생명권력의 안보 전략이다. p. 220 검사 절차를 받아들인 여성은 일반적으로 유전적 손상이 있는 아이를 가질 위험성 1퍼센트와 양수검사로 인한 유산 위험성 1퍼센트가 수치상으로는 똑같음에도 후자를 덜 위협적으로 여긴다. 장애아 출산과 유산의 확률을 비교할 때 작동하는 합리성은 이미 중립적이지 않다. 산전 장애아 검사 절차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정부가 견지하는 우생학적 합리성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아이를 잃는 유산의 고통보다 장애아를 낳는 고통의 크기가 더 크게 설정된 세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p. 283 소크라테스가 통치자에게 자기 돌봄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장애인은 활동지원 ‘이용자’로서 자기 돌봄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장애인은 자기를 돌보는 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 지 잘 알아야 한다. (중략) 활동지원사들이 자기 삶을 돌보기 위해 노조를 만든 이유도 여기 있다. 남을 돌보는 자는 우선 자기를 돌볼 줄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