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바람이 시린 겨울을 할퀴고 지나가던 2012년이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나는 막이 내리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통곡했다. 그리고 얼마 뒤,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민음사의 레미제라블 전집을 구해주었다. 영화의 인기가 높을 때라 서울 곳곳의 서점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미리엘 주교의 그 장엄한 자애로움에 숨을 죽이다가도 팡틴과 코제트의 기구한 명운 앞에서는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십 년이 흘렀다. 살면서 레미제라블을 채 다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하던 작년 어느 날, 레미제라블이 읽고 싶어졌다.
영화 속 'One Day More'의 그 벅찬 감동은 에포닌에 대한 연민으로, 가므로슈로를 향한 감탄으로, 때로는 테나르디에에 대한 이해로 번졌다. 장발장을 향한 안타까움은 존중을 넘어 경외심이 되었다. 이야기의 끝의 끄트머리까지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빅토르 위고에게는 대단하다는 말조차 감히 하기 어려워 다음 책으로 '파리의 노트르담'을 보기로 했다.
1권
서문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서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
p.31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 내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속에 그늘이 가득 차 있으면 거기에서 죄가 범해진다. 죄인은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 그늘을 만든 자다." 보다시피 그(미리엘 주교)는 사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만의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p.163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먼저, 노동자인 나에게 일거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나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닌가? 다음으로, 과오를 범하고 자백하기는 했지만, 징벌이 가혹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던가? 범죄인 쪽에서 범행에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도, 법률 쪽에서 형벌에 더 많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쪽의 저울판에, 속죄가 실려 있는 저울판에 과중한 무게가 실려 있지는 않았던가? 과중한 형벌은 범죄는 조금도 없애지 못하고, 입장을 뒤집어, 범죄자의 잘못을 억압의 잘못으로 바꾸어 놓고, 죄인을 희생자로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어 놓고, 바로 권리를 침범한 자 쪽에 결정적으로 권리를 부여한느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중략) 만약 맷돌 아래의 좁쌀에 생각이 있다면 좁쌀은 아마 장발장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p.300 말이 난 김에 말해 두는데, 장님이 되어서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완전한 것이 없는 사바세계에서는 실로 지상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이다. (중략) 세계가 자기의 눈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 사람의 성실함을 확인하는 것, (중략)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것, 자기가 그 걸음걸이의, 그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매 순간 자기 자신의 매력을 나타내는 것, 불구의 몸이 되어 갈수록 더 자기가 강력해짐을 느끼는 것, 어둠 속에서, 그리고 어둠을 통하여 스스로 태양이 되어 그 둘레를 그 천사가 맴돈다는 것, 이런 행복에 필적할 만한 행복은 거의 없다.
p.483. 그 순간 재판장 바로 옆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브르베, 슈닐디외, 코슈파유! 여기를 보시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온몸이 얼어 버리는 듯했다. 그렇게도 그 목소리는 비통하고 무시무시했다. (중략) 이 불행한 사나이는 미소를 띠고 방척객들과 판사들 쪽으로 돌아섰는데, 그 미소를 본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 생각하며 애처로운 생각을 금하지 못한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인 동시에 절망의 미소였다. "잘 보셨지요." 그는 말했다. "저는 장발장입니다." 법정 안에는 더 이상 판사도 없고 검사도 없고 헌병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고정된 시선과 감동한 마음뿐이었다.
2권
p.210 '총을 가져올 것을!' 하고 그는 생각했다. 테나르디에는 이중성격 소유자의 한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가운데를 지나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생애는 그들의 일면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게 절반 물속에 잠겨서 사는 것이다. 평온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테나르디에는 정직한 상인, 선량한 시민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어떤 처지에 빠지면, 어떤 충격이 그의 밑바닥의 성질을 들어 올리게 되면, 그는 악당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속에 괴물이 들어 있는 가게 주인이었다.
3권
p.282 썩 젊은 처녀 하나가 방긋이 열린 문틈에 서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고미다락 방의 천장이 바로 문 맞바라기에 있어서 그녀의 모습을 희멀건 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얼굴이 창백하고, 빼빼 마르고, 뼈만 앙상한 여자였다. 떨고 있는 싸늘한 알몸뚱이에는 한 장의 슈미즈와 치마뿐. 허리띠 대신 노끈을 매고, 머리쓰개 대신으로 노끈을 매고, 삐쭉한 어깨가 슈미즈에서 나오고, 림파성의 갈색 얼굴은 해쓱하고, 쇄골은 흙빛이고, 두 손은 빨갛고, 해벌름한 입술은 핏기가 없고, 이는 더러 빠졌고, 흐릿한 눈은 뻔뻔스럽고 천박했으며, 되다 만 처녀의 몰골에 타락한 노파의 눈. (중략) 유년 시절에는 틀림없이 예쁘기까지 했을 것이다. 한창때의 아리따움은 방종과 빈곤으로 인한 보기 흉한 겉늙음과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4권
p.100 "가요. 오! 참으로 기뻐도 하시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몇 걸음 후에 그녀는 멈춰 섰다. "나를 너무 바짝 따라오시네요, 마리우스 씨. 나를 앞서 가게 두고, 모른 척하고 따라오세요. 당신같이 훌륭한 젊은이가 나 같은 여자하고 같이 있는 걸 사람들이 봐서는 안 돼요." 어떠한 언어도 이 아이가 그렇게 말한 그 '여자'라는 말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수 없으리라.
p.210 1823년 이래, 몽페르메유의 싸구려 식당이 시나브로 기울어져, 파산의 구렁텅이는 아닐지라도, 작은 부채들의 시궁창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동안, 테나르디에 가시버시는 또 다른 두 아이를 가졌는데, 둘 다 사내아이였다. 그래서 오 남매가 되었다. 딸 둘에 아들 셋이었다. 그건 너무 많았다. 테나르디에의 아내는 아직 나이가 적고 아주 어린 마지막 두 아들을 이상한 요행수로 처리해 버렸다.
p.244 작은 애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따. 그는 돗자리의 가장자리에 있었고 형이 가운데 있었으므로, 가브로슈는 어머니가 그렇게 했을 것처럼 담요 가장자리를 매트 밑으로 접어 넣어 꼬마에게 베개가 되도록 헌 누더기들로 그의 머리 아래 돗자리를 높여 주었다.
p.552 "약속해 주세요!" "약속하겠어요." "내가 죽거들랑 이마에 키스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나는 그걸 느낄 거예요." 그녀는 마리우스의 무릎 위에 다시 머리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그는 이 가엾은 여자의 혼이 떠났다고 믿었다. 에포닌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가 영원히 잠들었다고 마리우스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는데 그 눈에는 죽음의 깊은 어둠이 나타나 있었으며, 그녀는 벌써 저승에서 오는 것 같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또, 말이에요. 마리우스 씨, 나는 당신을 좀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또 다시 미소를 지어 보려고 하다가 숨이 끊어졌다.
5권
p.85 총알들이 그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들보다 더 날쌨다. 그는 죽음과 뭔지 알 수 없는 무서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 유령의 들창코 얼굴이 다가올 때마다 이 부랑아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그렇지만 탄환 한 발이 다른 것들보다 더 잘 겨누어졌는지 또는 더 음흉했는지, 급기야는 도깨비불 같은 소년을 맞히고야 말았다.
p.120 승리가 진보에 알맞게 이루어진 때에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을 만 하지만, 영웅적인 패배는 그들의 감동을 받을 만하다. 전자는 장엄하고, 후자는 숭고하다. 성공보다도 순교를 더 좋아하는 나에겐 존바라운이 워싱턴보다 더 위대하고, 피자카네가 가리발디보다 더 위대하다. 누군가는 꼭 패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p.402 마리우스가 두루 생각해 본 어떤 범위 내에서, 그는 언제나 장 발장에 대한 어떤 두려움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아마 성스러운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아까 지적했거니와, 그는 이 사람 속에 '신적인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무엇을 해도, 어떤 정상참작을 찾아도, 언제나 꼭 이런 것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는 죄수다."라고. 다시 말해서 사회 계급에서, 마지막 단계의 아래에 있으므로, 자리조차도 없는 존재자라고. 인간 중 최하위의 다음이 죄수다.
p.486 코제트야, 네 작은 드레스가 보이느냐? 저기, 침대에? 그걸 알아보겠느냐?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십 년밖에 안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구나! 우리는 퍽 행복했다.
p.500 빅토르 위고는 영원한 진리의 먼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보다 한 걸음만 앞서서 횃불을 들고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는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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