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미터, 정상에 위치한 네팔 따레빌 스쿨 운동장에 우리가 탄 버스가 들어서자 유치원부터 8학년까지 60여명의 아이들이 환호를 보냈습니다. 저녁에 올라간 터라 서둘러 짐을 풀고 모기장을 설치하고, 샤워실을 만드는 동안 근처 아이들이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학교 바로 앞에 사는 자매, 오분 거리에 사는 소년, 20분 거리에 사는 형제 이 다섯명은 아침 저녁으로 학교에 와서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다 쓰레기를 뒤져 뽁뽁이를 갖고 놀 뿐, 먹을 것을 권해도 아이 하면서 칼같이 거절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얻어먹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지 싶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그중 한 아이를 손가락질하며 저녀석이 작년에 띠앗누리 물건을 훔쳤던 아이니까 조심하라고 일러줬습니다. 이미 그 이야기를 들었던 전, 손가락이 가르키는 녀석의 인상착의를 주의깊게 살피며, 아 저친구군요 하고 맞장구쳤습니다.
다음 날 저녁 일과를 마치고 쉬는데, 그 무리가 또 나타나 숙소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전 현지 아이들이 행여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게, 띠앗누리 단원들이 현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라고 되뇌이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이 어디있나 살폈고, 창문 근처에 놓인 물건들을 창밖에서 손에 닿지 않는 거리까지 슬쩍 슬쩍 밀어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어디선가 "우리 방 키 없어졌어요"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일과를 마치면 아무래도 방과 식당을 자유롭게 오가며 쉬기 때문에 매번 방을 잠그지 않고 열쇠를 문에 걸어두거나 한명이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도 열쇠가 안보였던 것입니다. "찬찬히 찾아봐"라고 말하면서도 제 눈은 그 아이를 쫒았습니다. "쌤 진짜 아무데도 없어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전 성큼 성큼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짜비, 짜비" 손으로 달라는 모양을 취하며 그 아이에게 네팔어로 열쇠라는 단어를 되풀이했습니다. 그 아이는 "노, 노"라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정말 이 아이는 도벽이 있는 건가. '우리는 이 곳에 와서 이 아이가 남의 것을 훔치고 싶게 만든 것인가.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벽 너머에서 "열쇠 찾았어요!"란 소리가 들렸습니다.
"열쇠 어디 있었어?", "누구 누구가 가지고 있었어요." 아이 쪽을 봤을 때, 아이는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을 때 제 표면적 마음은 '분실은 신뢰를 깨뜨리는 큰 일이야', '이런 역할은 내가 해야지'였지만, 더 깊숙히는 '넌 어쩔수 없는 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볼 때부터, 손가락이 가리키는 아이를 의심했고, 열쇠가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아이가 우리 곁에 있던 이유를 무엇인가 훔치기 위해서였다고 단정짓고, 아이를 범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사실은 한국에서부터, 현지인들을 우리 물건을 보면 훔쳐갈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고 대비했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견은 빗나갔고, 못된건 저였습니다.
평소 제딴에 입바른 소리라며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했고, 일상에서 과정으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내 다급함 앞에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었습니다.
그날 밤, 미안함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호기심에 20분 넘게 산길을 걸어와 주위를 맴돌던 자신을 다그칠 때 아이가 받았을 상처는 정말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 이름은 산데스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어찌나 반가운지 꽉 껴안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원할 때가지 비행기를 태워줬습니다. 사실은 미안하다고 했어야했지만, 그런 말도 못하고 이름만 불렀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한번 더 산데스를 볼 수 있다면, 꼭 그때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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