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
p. 171 세월호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p.208 불자동차
남루한 마을 어귀에 높이 솟은 소방서 망루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안도감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아, 저렇게 놓은 망루 위에서 소방관 아저씨가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살피고 있구나...... 그 안도감은 따뜻하고도 눈물겨웠다.
p. 198 서민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쌍소리를 찍찍 해대거나 쓰레기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귀족적 엄숙주의를 까부스는 발랄함이나 낮은 처지의 삶에 대한 포용력인 것처럼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p.309 고향1
한평생 염전에서 일해온 만경강 하구 마을의 전철수씨는 "한여름 일하고 나면 체중이 10킬로그램씩 빠지고, 겨울에는 다시 살이 오른다"고 말했다. 그의 몸은 한평생 여름 햇볕과 소금에 절여져서 가까이 가면 햇볕 냄새가 난다. 살갗 밑에 햇볕이 늘 쌓여 있다. (중략) 이제 염전이 끝장나면, 그가 또 어디로 갈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철야공사가 진행되는 방조제 앞에서 그의 고향은 위태로웠다.
할머니는 이렇게 손수 농사를 짓고 산나물을 캐서 작년에 5백만 원을 모았다. 할머니는 이 돈을 장가드는 손주에게 자동차를 사라고 주었다. 마을에 물이 차오르면 할머니도 결국은 별수 없이 마을을 떠나야 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 마지막날까지 평상심으로 살아간다.
p. 323 고향2
자연의 구체적인 부면들에 대한 개별적인 적응과 이용으로 이루어지던 생활 및 주거 형태에서, 일정한 지역의 전 범위에 걸쳐 단지 평면적인 아파트 건물군의 입지군으로서만 자연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는 새로운 생활 및 주거 형태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류기선, '근세의 일산')
p. 404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중략)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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