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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by simpleksoh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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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imbc.com)

배철수의 음악캠프

방송: FM4U 매일 저녁 6시~8시

www.imbc.com

 
 
매일 오후 여섯시가 되면 라디오나 어플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는다. 15년 전에 시작된 습관이다. 그때 나는 대학교를 휴학하고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사람들로 가득한 비좁은 복도에서 줄을 서고, 본강의, 보강, 문제풀이반으로 옮겨다니다가 저녁에는 학원에서 내어준 자습실에서 일과를 마무리했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가도, 나의 소명을 알고 있는 자라면 응당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자위했다. 처음 치룬 행정고시에 떨어졌을 때는 연습이었다고 변명했고, 그냥 해보는 거라며 치룬 7급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는 초조했다.

당시 정권은 이명박 정부였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친 후 탄생한 이 정부는 정권마다의 핵심가치를 정권의 명칭으로 사용해온 관례를 깨고, 공식 명칭 대신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이명박 정부라고 불렸다. 이 정권이 내세운 핵심 가치는 실용성이었다. 정권이 시작된 2008년, 광장마다 집회가 일어났다. 신문에는 집회나 시위와 관련하여 수배 중인 내 또래의 이름이 수시로 실렸다. 세계화의 덫, 20대 80의 사회, 변하지 않는 기득권, 패배감 등의 단어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1차에 합격한 적도 없는데, 면접에서 광장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주로 학원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혼자 주먹밥을 먹었다. 그래도 건강을 챙기겠다며 멸치가 들어있는 주먹밥을 선택했다. 그리고 학원에 돌아와 계단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한강을 바라보며 음악캠프를 듣곤 했다. 하루 중에서 공부하는 자가 아닌 그냥 나인 유일한 순간이었다. 어느 날 저녁 여지없이 옥상에서 음악캠프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었지 하며 곰곰히 원인을 찾아보니, 내가 사람들이 가득한 학원 복도에서 노래를 부르며 옥상으로 올라온 장면이 기억났다.

시험 준비를 그만두었다. 시험에 붙을 확신도 없었고, 공무원이 되어서도 내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불평등을 다루는 삶을 살겠다며 대학 기간 내내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고, 토익 점수 유효기간도 끝난 졸업학기에 처음으로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대학 내내 면담을 받으라고 해도 한 번도 안 받았는데, 졸업학기에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교수님은 출장에서 막 돌아오셨고 바쁘신 듯 했다.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니 그는 “지금 와. 목소리를 들어보니 네일이 더 급한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분야를 소개해주었다. '딸깍'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몇 번의 ‘딸깍’ 소리를 더 들었고, 지금은 장애운동의 자리에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오후 여섯시가 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던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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