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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듀 2019 상

by simpleksoh 2019.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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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정리하며 개인적인 '아듀 2019 상'을 선정했습니다. 올해는  ‘망막껌딱지 상’과 ‘처음 본 그사람 상’만 선정되었습니다.

- 망막껌딱지 상(영화): 족구왕(2013)

나는 B급 정서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B급 정서를 장르로 통칭하기에는 스펙트럼이 넓은데, 카프카의 ‘변신’을 예로 들면 어색할지 모르나, 투박하게 현실을 비튼 상상력이 주는 쾌감과 그런 상황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감을 좋아한다.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로는 팀버튼의 영화나 ’새엄마는 외계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이터널 선샤인’ 등을 좋아한다.

요즘에는 상상력의 코드로 시간이동을 다루는 영화가 많다. ‘어바웃타임’에서 주인공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나누던 대화는 빨간 웨딩드레스가 펄럭이는 비 오는 결혼식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족구왕’은 한 복학생의(안재홍) 철거된 족구장을 되찾기 위한 분투기다. 보다보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을 수 있는 편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 속에 숨어있는 시간이동 소재를 발견하면 분명히 한번 더 보고 싶어 질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본다면 영화를 또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 질 것이다.

잘 지내자, 우리(짙은): https://www.youtube.com/watch?v=e-ijD7kdTs4

 

- 처음 본 그사람 상(인물): 오시민

사람들은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작년 12월로 돌아가 더 많이 만지고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하고 싶다. 오시민을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12월이지만, 당시에는 이미 그해의 수상자를 선정하고 발표한 뒤였기에 2019년에 선정했다.

오시민은 나와 승아의 첫째 아이다. 12월 26일 임신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2019년 1월 17일 유산했음을 확인했다. 이미 유산한지 1~2주 지난 시점이었다.

시민은 우리가 아이를 가지면 붙이겠노라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이름이었다. ‘시민’이라는 용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 때였다. 익숙하다 못해 집보다 더 많이 잤을 중앙도서관 지하 1층 열람실 가운데 자리에서,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의자를 까닥 거리며 책을 읽는 것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더 재밌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책을 좋아하시는 편이라 대출이력이 많았는데, 하루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상대는 학교 도서관 직원이었는데, 책을 다양하게 많이 읽는 내가 궁금해서 전화했다고 했다. 당시 몇 차례 시위에 나갔던 나는 사상검증이라도 당할까 싶어 경계하면서 도서관 앞에서 그를 만났다. 우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고, 더 봐도 좋겠다 싶어 호칭을 어떻게 부를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민 백 OO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답했다.

‘시민’이 형성되는 과정을 책에서야 보았지만, 2000년 대 대한민국에서의 ’시민’은 지위도, 돈도, 권력도 없어서 밀면 밀리고 쫓으면 쫓기는, 달리 부를 호칭이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인 줄 알았다. 그날의 대화 이후, 나에게 ‘시민’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저항할 줄 아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로 재정의되었다.

2018년 10월, 승아와 결혼을 한 뒤, 아이에 대한 계획은 따로 세우지 않았다.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내가 몇 살까지 일해야 하는지 셈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에 나와 승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생긴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노라 생각했지만, 굳이 아이를 가질 노력은 하지 않았다. 좋은 소식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둘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해주면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이름은 필요했다. 나중에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가고 싶은 아이를 계속 ‘아이’라고만 부르니 영 현실감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때 자연스럽게 꺼낸 이름이 ‘오시민’이었다. 이름이 생긴 뒤 시민이는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많아졌다.

2018년 12월 26일, 굉장히 춥던 어느날, 집 근처에 사는 친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들려 로버트 먼치의 아동 동화책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선물했다. 친구는 나중에 부부가 같이 와서 함께 4인용 보드게임을 하자고 했다. 집에 돌아오니, 승아가 두 줄이 선명한 임신 테스트기를 보여주었다. 서로 몸조심할 시기가 엇갈리니 친구를 만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12월 31일 병원에 가서 아이를 처음 보았다. 예상치 못하게 온 아이는 바로 시민이가 되었고 함께 하는 시간은 재밌었다. 초음파 사진에 보이는 시민이는 예뻤다.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약간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면 웅크리고 있을 시민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승아는 이미 육아 공부를 하고 있었고, 행복카드를 신청했다.

1월 1일 성묘를 갔고, 승아는 계속 출퇴근을 했다. 살면서 서울 근교에서 이사를 4번 다녔고, 통학이나 출퇴근을 자동차, 버스, 지하철로 다 해보았지만, 서울의 출퇴근길은 모두 고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사람의 진을 빼는지, 매일 다니면서도 가끔은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어떻게 매일 이런 길을 자진해서 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1월 8일, 승아는 두 번 째로 병원에 갔다. 나는 다른 단체 사람들과 함께 진행한 교육을 마치고 안국역 불고기집에 있었다. 막 주문을 했을 때 승아가 전화를 해 유산했음을 알렸다. 나와 승아는 이태원 푸틴 가게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동안 슬펐고, 한동안 화가 났다. 새끼를 밴 암캐가 으르렁거리는 것이 몸이 불편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이 사회의 구성원은 내 아이가 건강히 태어나게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잠잠해지자 시민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과 일부 친척 및 지인 외에는 시민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선 임신 소식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유산 소식을 알렸다. 사람들은 날 위로해주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산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부부가 유산을 겪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말로 들었을 때는 짐작만 했던 슬픔이 훨씬 큰 것에 놀랐고, 그 슬픔을 이 많은 사람들이 겪고 살아간다는데 놀랐다.

항상 택배기사님께 드릴 음료수를 준비하는 승아를 닮았다면 그 음료수를 몰래 먹는 나보다는 선한 아이가 되었을 시민이. 난 승아의 성을 따서 이오시민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던 시민이. 언젠가 승아와 함께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민이에게 선물을 주신 노을, 조아름 부부와 안명호 작가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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