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책]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김도현, 메이데이, 2007)

by simpleksoh 2020. 6. 11.
반응형

 

 
 
 
코로나19에 대한 정부 주도의 방역전에서 우리는 제대로 작동하는 공적제도를 확인했다. 투명성에 기반한 정책을 신뢰하는 민주적 시민성과 함께 위험을 최소화한 우리나라의 사례는 그간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던 나라의 대응과 대비되었고, 시민들이 국가에 대해 갖는 자부심도 상승했다. 사람들은 정부 주도의 시스템이 개인과 사회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정부 정책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코로나19는 다른 전염병과 비교하여 치명률이 낮고 전파력은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올해 2월 폭발했던 코로나19 확산을 진정시키며 국제사회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6월 10일 기준, 코로나19 국내 확진환자 수는 11,902명이며 사망자 수는 276명이다.
 
2018년에 신규 등록된 장애인 수는 40,239명*이다. 장애를 원인으로 하는 사망은 그 범위를 선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장애인의 조사망률(10만 명당 사망인구수)은 2,164.8명으로 전체 인구 조사망률 530.8명보다 4배가량 높다. 사망 시 평균 연령은 장애유형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데, 기대수명이 가장 낮은 장애는 자폐성 장애(28.2세)이며, 가장 높은 장애는 청각장애(80.34세)이다. 지적장애(50.6세)나 간장애(57.6세) 등도 전체 인구 기대수명(2012년, 81.4세) 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
 
* 한 눈에 보는 2019 장애인통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2019
** 오승연 등, 장애인의 위험보장 강화 방안, 보험연구원, 2018
 
올해 상반기에 새로 장애를 입는 사람의 숫자는 동기간에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 숫자의 2배로 예상할 수 있다. 정부 추산 장애인 등록률이 94.1%, 등록된 전체 장애인 수가 251만 명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코로나19 확진을 받을 확률보다 장애인이 될 확률이 높다.
 
코로나19에 대한 사회의 반응에는 정부가 확산 저지에 실패했을 경우 그 피해가 훨씬 클 수 있었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사회의 반응이 과하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사회가 자본이나 성장의 가치보다 생명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한 지금이, 우리 사회가 매년 코로나 환자보다 4배나 발생하는 장애인의 신체적 특징을 무시하여, 그들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인식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각 정권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장애 이슈에 있어 앞선 편이 전혀 아니다. 코로나19와 장애 이슈에 정부가 대응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시급성은 다른 걸까? 장애 이슈를 다루는 정부 대응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의 차이는 코로나19와 장애에 기인한 사망률의 차이일까?
 
위 차이의 큰 부분은 해당 이슈가 나의 문제로 인식되는지에 기인한다. 매년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4배씩 장애인이 증가하고, 뉴스에는 시설물 관리 미비에 의한 장애인 사망사고 기사가 나오지만, 많은 사람들은 출근길에서 장애인 운동 집회를 마주치는 어느 날 아침,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안되지' 라고 생각하기 쉽다.
 
장애인이 장애우보다 나은 표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친구'라는 우호적인 표현이 장애에 배타적인 사회의 이면을 감추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장애에 대해 생각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내 주변에 장애인 복지카드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장애인을 떠올리는 순간은 이런저런 지원서를 작성하며 '장애인 우대사항' 란에 '해당사항 없음'을 기재할 때, 친구가 시력만을 사유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내가 들어가지 못한 자리에 장애인이 들어간 것을 알았던 적은 없었으며, 공익근무를 한 친구가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 또한 본 적이 없었다.
 
일상에서 장애인을 마주치는 곳은 주로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이었다. 아침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 다른 이가 하듯 좁은 자리에 몸을 밀어 넣을 수 없기 때문에 옆으로 비켜나서, 뒤에 있던 사람이 먼저 타는 장면을 바라보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을 보며 '저 사람은 오늘 지각하겠네'라고 생각했다. 지하철 안에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주로 문 앞에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울까 딴청을 피면서 다른 승객들이 그를 쳐다보는지 슬쩍 확인했다.
 
장애인을 마주치는 일은 일 년에 몇 차례 되지 않았다. 내 삶에서 장애인이 어떻게 돈을 벌고 삶을 이어나가는지 생각할 필요를 느낀 적은 없었다. 사회가 장애인에게 출발선을 맞춰줄 필요는 있지만 의무보다는 배려에 가깝게 생각했고, 그 배려의 적정선은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수준이라는 단어 안에 응당 고려되어야 할 출근을 위한 이동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교육권,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권, 안전하고 존엄한 삶의 기반이 되는 주거권,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한 인권이 어떻게 얼마나 적절하게 반영되어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간혹 광화문에서 장애인 영정을 보았으며, 뉴스에서 지하철 역사 내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 소식을 들으면서 내가 속한 사회가 일상적으로 장애인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애인 이슈를 내 저녁 메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선택을 하였으나 장애인 이슈는 하루 이상 생각이라도 계속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사회 안의 장애인 관련 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사회적 비용, 효율성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작금의 사회에서, 장애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자본주의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장애인들의 신체적 특징에서 설득력 있게 찾아낸다는 것이다.
 
지난 4월 20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 ' 마침말을 하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는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장애인 운동을 하면서 도로나 시설물을 점거할 때마다 경찰들과 나누었다고 이야기해준 말을 덧붙인다.
 
"당신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권리도 중요합니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위험합니다. 안전선 안으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의 삶은 항상 위험했고, 언제나 재난이었습니다. 나는 방 안에 20년을 갇혀있다가 사회로 나왔습니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에도 나는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난 집 밖에 나오는 게 좋지만, 내 출근길은 언제나 어려웠습니다. 나는 운동기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일하려고 해도, 내가 일을 하러 갈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p.42, 우리는 손상을 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부재한 것, 또는 신체의 일부나 그 기능의 불완전한 상태로 정의한다. 그리고 장애는 육체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사회 조직이 불완전하거나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불리와 활동의 제약이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 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p.43, 흑인은 19세기 후반까지도 노예로 존재해야만 했다. (중략) 흑인은 흑인일 뿐인데,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에서 노예로 존재했다.
 
p.48, 농인들이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농인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들은 장애인이 된다.
 
p. 52, 장애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 인간이 지닌 다중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로 장애인 차별주의이다.
 
p. 55, 장애우라는 표현, 즉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당신은 장애인이고 우리는 비장애인이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인을 규정하고 있는 용어인 것이다. (중략)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p. 62, 정상인·일반인이라는 말이 일정한 편견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비장애인이라는 말에 왠지 모를 석연치 않음을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가 (중략) 여성이나 동성애, 흑인이라는 기표는 그래서 본래의 의미 이외에 다른 부정적인 기의가 2차적으로 결합되는 과정, 즉 낙인화의 과정이 수반되지만 장애인은 주어진 명칭 자체가 낙인이다. 즉 장애인은 낙인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짓기 자체에서 낙인이 찍혀진 거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p. 65, 장애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인 무엇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단지 부정적인 것의 아님으로 규정되는 것은 비장애인의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지정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불안감을 준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와 확실히 단절하고 싶은 욕망을 지닌다. "합격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불합격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뒤에 "그런데···"가 연결되며 언제든지 불안한 것이다. 더 나아가 장애인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있음'이 아니라 '없음'의 존재였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다른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중략) 존재하지 않는 것의 아님으로 어떤 집단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모순일지도 모를 일이다.
 
p. 70, 느리게 변화하는 산재된 농촌 공동체에서 성장해 온 맹인과 농인들은 특별한 준비 없이 보다 쉽게 그러한 사회들에서의 노동과 삶에 동화되어 왔다. (중략) 시각장애도 혼잡하지 안고 익숙한 농촌의 환경들 내에서는 덜 위험했으며, 반복적인 촉각의 기능과 관련된 일상의 직무들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학습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의 환경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p.73, 산업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표준적인 노동자의 육체에 부합하지 않아서 노동력이 효과적으로 지워지고 임노동으로부터 배제되는,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냈다.
 
p. 74, 비장애인은 하루에 20개의 과일을 따고 장애인은 10개의 과일을 따더라도, (중략) 2명의 장애인이 노동에서 배제되어 하루 160개의 과일을 따는 것보다는 장애인도 함께 참여해 180개의 과일을 따는 것이 유리 (중략) 축구 경기에서 11명의 구성원 중 1명의 능력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해도 1명을 빼고 10명이 뛰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역할을 하는 것이 팀에 유리하다. (중략)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은 전혀 다르다. (중략) 일정한 기준에 미달하면 경기에 참여도 못해보고 '잘린다'.
 
p. 82, 미국은 세계 최초로 1907년에 세계 최초로 인디애나주에서 단종법을 제정하여 확정판결을 받은 범죄자, 백치, 정신박약자 등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략) 1921년에서 1964년 사이에 6만 3천 명 이상의 장애인들이 장애아의 출산을 막고 사회적 비용을 절감한다는 우생학의 논리에 따라 강제 불임을 당해야 했다. (중략) 장애인은 나치 치하에서 1942년까지 무려 27만 5천여 명이 사살되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학살과 강제 불임은 은폐되었고 단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시작으로서만 설명되었으며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전승국 대부분의 국가들도 이와 유사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p. 91, 이동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학교에 다니며, 일터에 나가 노동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동권은 곧 생존권이며
 
p. 96, "우리의 행동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30분 늦는 것을 비난한다면 달게 감수하겠다. 그러나 30분이 아닌 30년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현실에 대해, 장애인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p. 102, 《2005년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45.2%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p. 110, 장애인은 왜 여기(교육)에서 배제되고 방치되는가? 답은 대강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무능력화 되어있는 장애인들은 교육을 통해 강제하지 않아도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둘째, 교육을 시켜도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p. 113, 전체 장애인구 중 70%가 실업 내지는 반실업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p. 174, 마서즈 비니어드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보스턴 남부에 있는 섬으로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전적 요인과 한정된 집단 내에서의 결혼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높은 청각장애인 인구 비율을 나타내고 있었다. (중략) 마서즈 비니어드에서는 청각장애는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기에 신상 명세에 항상 기록되는 무엇이 아니었다.(중략) 그들은 일반적으로 평균 또는 평균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다고 한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장애인에게 일방적인 적응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장애인에게 적응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즉, 마서즈 비니어드 사회는 음성 언어 문화와 농문화가 서로 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략) 장애인에게 사회적으로 부과된 것으로서의 디스어빌리티disability가 아니라 인간학적 차이로서의 임페어먼트impairment는 그들의 삶의 경험과 양식에서 하나의 고유성을 부여한다. 이 고유성을 부정한 채 통합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통합이 아니라 내부적 식민화일 뿐이며
 
p. 204, 진정 장애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닐까? (중략)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단지 장애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노약자·임산부·어린이 등 사회 전체 구성원을 위한 일이라든지 전체 장애인의 89.4%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사실 속에서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든지 하는 얘기를 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틀렸다고 얘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근본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근거가 '보험'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고 강화하는 이기심에 부박하게 편승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러한 논리로 우리 모두가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여성이 될 가능성이 없는 남성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흑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백인 역시 인종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 또는 장애인 운동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은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의 문제가 여성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매개로 한 여성-남성간 관계의 문제이며, 노동의 문제가 노동자 일방의 문제가 아닌 노동력의 상품화를 매개로 한 노동자-자본가간 관계의 문제인 것처럼, 장애의 문제는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매개로 한 장애인-비장애인간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데 기본 원칙인 경쟁과 효율성, 그리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애인의 인권을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은 바로 이러한 경쟁 및 효율성의 원칙과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김도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