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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세월호는 나에게 왜 중요한가

by simpleksoh 201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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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록

2014 4 16 아침,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요일에 휴가를 쓰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제주행 여객선이 침몰했다. 수학여행 중인 고등학생 다수가 타고 있다."라는 속보를 보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얼마 전인 2, 10명의 사망자가 나온 경주 체육관 붕괴사고를 떠올렸다. 안전사고는 어째서인지 종종 발생하고, 안타까운 사상자가 생기지만 잊히는 일로 생각했다. 그날도 그랬다.

며칠 뒤면 세월호가 침몰한지 년이 되고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세월호는 사람들에게 무시할 없는, 무시해야 하는 이슈가 되었다. 세월호를 두고 편이 갈렸다. 그리고 이제, 어떤 이는 세월호에 무관심할 있는 시간이 되었다.


세월호를 대하는 여러 사람들

주변을 보면, 세월호 참사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화문 농성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청년, 유가족을 모시고 간담회를 진행한 회사원, 거리에서 특별법 촉구 서명운동을 하던 시민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세월호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당사자가 아닌데, 그렇게 꾸준히 활동하는지 의아했다. 광화문에 계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분들이 익숙해지면서, 그분들의 슬픔에 대한 공감이 주는 피곤함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횟수가 늘었다. 이제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음 단계로, 안전사회로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세월호 참사와 안전을 분리해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뉴스에서도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사가 줄어들었다. 세월호 논쟁을 소모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생겼으며, 세월호 참사는 점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이용당하는 정치적 이슈가 되어갔다.


세월호는 잊혀져도 되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를 잊기 위해선, 그래서 이별을 시작하기 위해선, 우리가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있어야 한다. 이상은 불가항력이라고 판단될 우리는 비로소 포기라는 받아들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법을 포함하여 인양 문제에 이르기까지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에겐 관련된 어떤 것도 최선이나 불가항력이라고 인정할만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마련해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책임자를 명확히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 세월호를 인양해서 마지막 명까지 실종자를 차가운 바닷속에 두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분들이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인정할 있도록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제서야 그분들은 이별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정말 세월호 이야기가 지겹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분들 탓이 아니다. 그분들을 세월호에 붙잡아 두는 이별의 조건도 마련해 주지 않고 무조건 잊으라고만 하는 이들 탓이다. 그분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별을 시작하고 싶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

이별할 있는 최소한의 조건중에서 - 김진혁 ( EBS 지식채널e PD)


세월호는 나에게 중요한가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름, 주위사람과의 관계, 직업 등을 쉽게 떠올릴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이름이 오규상 아니라 유재석이라면, 주변 사람들의 실없는 농담 소재가 하나 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춤을 추면 신이 난다, 친구를 만나면 즐겁다, 아이가 예쁘다,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같은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이 모여서 가치관을 형성하고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근본적으로 아닐 있다면, 그런지 아닌지 신뢰할 없다면, 스스로 나에 대해서 갖는 인식이 불확실해진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불합리한 사건이다. 모든 노력을 다해 원인을 찾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마지막 명의 실종자까지 찾아서 사과해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없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모른 한다면, 다른 문제를 보아도 판단할 당위성이 사라진다. 판단의 일관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2013 4 23, 외삼촌이 세상을 떠났다. 어릴 집안사정으로 인해서 동안 길러준 삼촌이었다. 당시 삼촌은 신혼이었고, 외숙모는 임신 중이었다. 착한 분이었다. 자란 때마다 삼촌은 "~ 장근이(애칭) 왔어" 라며 반겨주셨다. 취직 바쁘단 이유로 가지 않다가, 술을 좋아하는 삼촌께 고깃집에서 돈으로 식사를 처음 대접한 것이 1월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의사의 비관적인 견해를 듣고 수술실 밖에서 혹시 모를 행운을 기다리던 그날 밤의 고통을 기억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이성으로 짐작하면서, 조금의 가능성을 믿던 순간이 환희의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의사가 늦게 나올수록 수술의 어려워짐과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했다.

삼촌이 가신지 년이 지났고, 세월호가 침몰한지 년이 지났다. 가족을 보내 사람은 상을 치르는 고통을 안다. 동안 상을 치르는 것은 어떤 고통일까. 동안 가족을 다시 적은 가능성을 상상하고, 이내 그것의 어려움을 되새기는 마음은 어떨까.


광화문에서 만난 유가족

20154 5 부활절, 광명에서 광화문까지 유가족을 따라 걸었다. 유가족 250명을 포함해 광명에서 출발한 500명의 사람들은 광화문에 도착할 1,500명이 되었고, 그날 광화문에는 4천여 명이 모였다. 그날 느꼈던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광명에서 광화문까지 함께 걸었던 시민들 ⓒ 간단한인간

오늘 있던 영정도보행진의 마무리는, 광화문 광장을 반으로 갈라, 양쪽으로 4천여 명의 시민들과 줄로 길게 유가족 분들이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광화문 광장을 따라 길게 갈라진 사람들 사이의 틈을 보면서, 유가족 분들이 이렇게 길게 줄로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유가족 분들께서는 틈을 촘촘히 서셨다. 유가족이 많음을, 슬픔이 많음을 실감했다.

앞에는 목에 여학생의 영정을 매신 어머님께서 서셨다. 어머님과 인사를 나눌 , 어머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딸은 2학년 3 백지숙입니다."

따님의 이름을 또박 또박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마음과 따님의 이름의 무게가 내게 전해졌다.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들이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있었다.

기억하겠습니다. 기소권, 수사권 없이 남은 조사권도 시행령으로 흐지부지 만들려는 시도 속에서, 따님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있다. 다만,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이제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만 궁금해 하고 내가 말하는 방식으로 슬퍼하라는 이야기는 납득할 없다.

광화문에서 함께 들었던 이야기 ⓒ 간단한인간

 

다시 돌아온 사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하여 단식 농성을 하셨던 유가족들께서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며 다시 단식을 시작하셨다.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던 광화문과 팽목항에도 다시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다.

4 7, 새정치민주연합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 158명이 세월호 인양 촉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전체 국회의원의 반을 넘는 숫자이다. 여기엔 참사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던 이주영 의원도 있다. 시행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해수부에서는 4 9 예정된 시행령 심의를 위한 차관회의를 일주일 연기하고 여론을 수렴하기로 했다. 4 11일에는 광화문에서 집회 참가자와 경찰이 충돌하여 유가족 3명을 포함한 20명이 연행되었다.

다시 돌아온 4,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와 행동이 있을 예정이다. 그곳에서, 각자의 세월호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눠보면 어떨까 한다.


글은 백지숙양의 유가족과 김진혁 PD 허락을 구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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