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책]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 호우잉, 신영복 옮김, 다섯수레, 1991)

by simpleksoh 2020. 5. 5.
반응형

 

고 신영복 선생의 삶의 궤적 그리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비롯한 그의 저서에서 나는 삶의 지침들을 찾았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이 번역한 '사람아 아, 사람아!"는 한동안 읽지 못했다. 중국 현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문화혁명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도 있었다. 그러나 사상과 사랑에서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휴머니즘은 체제와 무관하게 아름다웠고, 위기 앞에 지레 위축되는 그들에게서는 다른 시대의 나를 발견했다.

 

2015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한 지 일 년이 되어가면서, 세월호를 두고 사회가  편 갈리던 어느 날, 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었다. 어스름이 오는 저녁, 소수만 남은 집회 무리는 전경과 버스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월호를 잊을 수 없는 유가족과 세월호를 잊고자 하는 정부와 마찬가지로 그곳의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엉켰다. 잠깐 사이에 십 수명이 균형을 잃고 우르르 쓰러졌다. 난 누군가의 위, 누군가의 아래에 누웠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러다 사람 다친다"라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면서 압박이 느슨해질 때,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며 사람들이 엉킨 무더기를 빠져나왔다. 잠시 숨을 고르니 근처에 대기 중이던 소방차가 사람을 싣고 사이렌을 울리며 떠나가고 있었다. 한 무리씩 소멸해가는 집회 그룹을 보며, '우리가 만 명만 됐다면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텐데. 힘이 모자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서 광장 가운데의 광화문역 9번 출구로 향했다. 한 젊은 여성이 "여러분 가지 마십시오"라며 연신 울부짖었다. 그 여성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보다 만 배만 끈질기다면, 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텐데. 난 참 겁이 많구나.' 그날의 패배감은 두배로 무거웠다.

 

2017년 10월, 준비했던 기획안이 폐기되었다. 내가 그 조직에 있을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한 아이템이었고, 최종 결재권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조직에서는 내가 행복할 일을 시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부터 일을 할 때 고민하지 않았다. 논쟁 대신, 포기하고 비위를 맞춰주고는 뒤에서 욕을 했다. 갈등 상황이 생기면, 대충 결정권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당면한 위기를 대충 수습하면서 2년 넘는 시간을 더 보냈다. 내가 바라는 나의 삶은 잠들기 직전 공상 속에 있었다. 깨어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그리는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한두 줄로 표현하기 어려워 인상 깊었던 세 장을 일부 발췌하여 기재한다.

 

p. 404, 요 뤄쇠

"그럼 서기 개인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죠?" 하고 나는 물었다.

"그건 안돼. 내가 직접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곤란해.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자네 이름으로 자료를 내는 것이 좋아. 같은 것을 3부 만들어서 대학의 당 위원회와 출판사와 성 위원회의 선전부에 내는거야. 나는 당 위원회에 낼 자료에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여 쓰도록 하지. 그리고 성 위원회 선전부의 후 부장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어. 내가 아는 한 그는 당면한 사상 전선의 상황에 비판적이야."

"그 사람은 계속 입원 중이고 그쪽의 전문가가 아닌데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자네는 몰라. 그의 입원은 일종의 무언의 항의야. 당면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거지. 우리는 오랜 전우 사이니까 그에 대해서는 잘 알아. 전문가가 아니라고? 자네도 아마추어는 전문가를 지도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는가?"

 분명히 '연줄'과 '뒷구멍'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연줄이 이런 것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쨌든 후 부장은 출판사의 직속 상사이다.

 

p. 420, 소설가

 아무리 바빠도 호 군과 손 유에를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설마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의 출판 문제가 출판사에서 그럴듯한 가십거리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 머리는 원래 단순하다. 저작에 일정한 학술적 가치가 있고 저자가 공민권을 가진 공민이며 출판사가 그 저작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도중에 대학 당 위원회 서기가 튀어나와서 출판에 이의를 제기하더니 인쇄 기계가 멈추고 말았다. 날마다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고들 있지만 이것은 도대체 무슨 주의인가? 정부나 법률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옆에서 끼어든 손이 위력을 갖다니! (중략)

 "규율 검사 위원회에 제소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규율 검사 위원회에도 역시 시 류 같은 인간이 있다구!" 슈 홍종이 즉석에서 반박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다는 거야? 방법이 없다는 건가? 지금은 과거에 비하다면 훨씬 좋아졌잖아. 자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 나는 약간 짜증이 나서 그에게 대들었다.

 슈 홍종에게는 감탄도 하지만 혐오감도 느낀다. 감탄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경우 언제나 주도 면밀하게 생각을 해서 마치 형님 같은 품격을 보인다는 점이다.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사물에 대해서 대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정경을 그려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언제나 그런 사태는 불가피한 것이며 거기에는 손도 발도 내밀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이런 식으로 된 것일까? 그가 받은 부당한 처우는 호 군이나 손 유예에 비한다면 미미한 것이 아닌가.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나는 호 군이 시 류에게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 왕의 문장은 자기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거야. 그리고 저작에 대한 시 류의 의견을 이쪽에서 물어서 고쳐 쓸 의향을 나타내는 거지. 그렇게 하면 긴장은 풀릴 거야. 원한은 풀어야지 묶어서는 안 되는 거야. 권력 있는 자와 원한 관계를 맺으면 바보 꼴을 당하게 될 뿐이지. 물론 호 군은 그런 것은 싫다고 할는지도 모르지만." 슈 홍종은 나의 지지를 얻고 싶은 모양인지 계속 나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호 젠후가 말했다. "그건 안 돼.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조직의 계통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야."

 "하지만 요즘은 공식적인 조직 계통에 의존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확실히 우리는 날마다 지금은 법제의 시대라는 말을 듣고 있지. 하지만 자네들 역시 C시 대학에서는 법은 시 류의 입에 있다는 것쯤 알고 있겠지. 조금쯤 타협한다 해서 뭐가 나빠. 출판이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될 것 아닌가. 자네가 시 류에게 고쳐 쓰겠다는 말을 하면 실제로는 고쳐 쓰지 않더라도 그가 스스로 대조해가며 조사할 것도 아니야.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 주고 그에게 자기의 권력이 유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어도 자네에게는 조금도 장해가 안돼." 슈 홍종이 겨루듯이 말했다. (중략)

 "그러나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조적 속박을 깨뜨리는 거지. 시 류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야. (중략) " 호 젠후가 반박했다.

 이것이야말로 '내상'이라는 것이 아닐까. 표면에 상처가 없지만 내부에서는 조직의 괴사가 진행되고 있다. 법치가 행해짐이 없이 어떻게 이런 형상이 극복될 수 있으며 또 이런 현상의 극복 없이 어떻게 법치가 행해질 수 있을 것인가. (중략)

 "도대체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어? 출판 문제만 쓰면 그것으로 좋잖아. 다른 문제를 써서 어떻게 할 거야? 중국에는 십억 인구가 있지만, 아무도 문제삼고 있지 않아.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은 당신들뿐이야. 그렇지 않아?"

 "그건 말이 안 돼요.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나도 모르게 리 이닝에게 말했다. 그녀와는 그다지 친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 자제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 쪽은 자제고 뭐고 없다. "찬성한다면 당신이 하면 돼요. 하지만 당신은 이러한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쓴 적이 없잖아요!" (중략)

 나는 이미 '뛰어난 재목'이 될 '최적기'를 지났다. 닭으로 치면 늙은 닭이어서 제대로 달걀을 낳지도 못한다. 달걀로 친다면 반쯤 품다만 달걀이어서 새삼스럽게 부화될 수도 없다. 아직, 이대로 끝나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길에 커다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신천지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것은 전력을 다해서 지지한다. 나는 누가 올린 성과이건 간에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며 누가 불행에 빠지건 간에 진심으로 동정을 보낸다. (중략)

 "내게는 용기도 재능도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지지할 권리도 빼앗는 거요?" (중략)

 "당신의 지지는 그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에요. 중국이란 그런 나라예요. 영원히 나아지지 않아요. 중국인은 노예근성과 나태의 덩어리라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 생각만 할 뿐 실천을 하지 못하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라기만 할 뿐 자기는 방관자로 일관하고 '비판의 권리를 보류'하지요." (중략)

 "우리들의 중국을, 우리들의 인민을 왜 그런 식으로 보지? 나는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자식은 어머니가 추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들이 문제의 산에 부딪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역시 내 나라, 내 민족을 좋아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어. 모두들, 중국에는  이미 희망이 없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는 거지?"

 슈 홍종이 웃으며 말했다. "살아 가는데 목적이 없으면 안 되는 건가? 나는 구십 구 퍼센트의 인간은 목적 없이 살고 있다고 믿어. 또는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도 좋겠지."

 손 유예는 점점 격앙되었다. 양 눈썹을 곧추세우고 분노의 눈길을 슈 홍종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어딘가 다른 곳에 가서 살지 않겠어? 우리의 조국과 인민을 조소하지 말고, 우리들이 하는 일에 찬물을 끼얹지 말고, 우리들의 희생을 방해하지 말고! 무의미한 희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중략)

 호 젠후는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다시 한번 슈 홍종의 손을 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슈 군, 자네가 정나미 떨어진 것은 우리들의 앞길이 평탄하지 않고 거대한 대가와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자네는 그 대가와 희생의 크기에 위축되어 버린 거지, 안 그런가?"

 

p. 437, 자오 젠호안

손 유예의 편지

 당신과의 관계는 내게 있어서 중요한 역사가 되어 있습니다. (중략) 당신을 용서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요. 하물며 내가 당신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개인적인 원한에 사로잡혀서 나 자신을 버림받은 불쌍한 존재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중략)

 우리들의 비극의 책임을 맨 먼저 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며 결코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과의 결혼을 승낙했을 때 내게는 우정과 감사의 마음이 있었을 뿐 애정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젠후처럼 나를 끌어당기고 뒤흔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나는 젠후와 결합되기를 갈망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당신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를 저버리고 지조가 없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젠후가 '우파'로 몰린 다음부터는 특히 내 경력에 '정치적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젠호안, 우리들의 옛날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클라스메이트이며 친구입니다. 우리들은 원래 그랬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들은 겨우 자기와 상대를 비교적 올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관계를 확립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는지요. (중략)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잃어야 할 것을 잃고 되찾아야 할 것을 되찾았어."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아 아, 사람아!

신영복

반응형